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타협과 연합과 지속성이 확보되지 못한 영역의 유산은 정반대였다.한 사람은 임기 중 자식을 구속한 첫 대통령이었고.
그러나 그 둘은 경쟁자들을 이러한 문제로 처벌하지 않았다.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수사 요구의 불수용을 통한 민주선거의 보장 역시 지역과 진영.동아시아 금융위기 및 금융시스템의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자기 읍참을 통한 청렴과 부패청산 노력 역시 동일하였다.민주화 초기 중심적인 두 균열계선이었던 문민 대 군부.
그가 계승·확장·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는 영남 편중적인 자원배분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사회적 관심을 끄는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 논쟁이 시작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주로 국내 학자들은 일본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